2019년 겨울호

슈퍼컴퓨팅 강국을 위한 제언

안신영(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

슈퍼컴퓨팅

매년 11월 말에는 슈퍼컴퓨팅(Supercomputing) 전시회가 미국에서 열린다. 이 전시회를 통해 슈퍼컴퓨팅 관련 최신 기술들이 소개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 500대의 순위가 새롭게 발표된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는 미국 오크리지 국립 연구소의 서밋(SUMMIT)이라는 시스템으로 실측 성능 148.6 페타플롭스의 계산 성능을 자랑한다[1]. 이 수치는 배정도(Double Precision, 64bit) 부동소수점 연산을 초당 14경8600조번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개인용 컴퓨터 약 300만대를 동시에 사용할 때 얻을 수 있는 계산 용량이다. 슈퍼컴퓨터는 일기 예보, 암호 해독, 신소재 개발, 양자역학적 시뮬레이션 등 복잡한 계산이 필요한 작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슈퍼컴퓨터는 기초과학연구를 지원함으로써 우수한 논문 생산에 직접 기여할 뿐 아니라 산업적으로 신제품 개발을 촉진하는 등 국가 과학기술경쟁력을 높이는데 기여한다[2].

슈퍼컴퓨팅의 새로운 미션 인공지능 계산

최근 슈퍼컴퓨터는 전통적으로 가졌던 거대과학문제 해결이라는 미션에 더하여 인공지능을 위한 계산이라는 새로운 미션을 가지게 되었다. 인공지능이란 사람의 인지, 학습 능력의 일부를 컴퓨터를 이용해 구현하는 지능 또는 이를 연구하는 학분 분야를 의미한다. 인공지능이 현재와 같이 급속하게 발전된 이유는 인공지능 알고리즘 연구에서의 진보와 더불어 빅데이터의 축적 그리고 대규모 계산량을 요구하는 인공지능 응용의 계산 요구사항을 만족할 수 있는 GPU와 같은 고속 프로세서와 고성능컴퓨팅시스템의 결합 덕분이다. 2016년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인 AlphaGo는 당시 세계 300위권의 고성능컴퓨팅시스템을 활용하여 세계 최정상 바둑 기사인 이세돌 9단을 4:1로 이긴 바 있다[5]. 특히 빅데이터를 학습하는 딥러닝(심층학습) 알고리즘은 연산 강도가 높은 알고리즘으로 고성능컴퓨팅 시스템의 활용이 필수적이다. 

국가경쟁력의 지표로서의 슈퍼컴퓨터

슈퍼컴퓨터는 국가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가름하는 지표로 사용되곤 한다. 미국은 슈퍼컴퓨팅 시스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년간 5000억원이상의 예산을 투자하고 있다. 중국 또한 자체 개발 기술로 세계 1위를 차지한 경험을 다수 가지고 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슈퍼컴퓨팅 강국이었으나 그 자리를 중국에 내준 일본은 자존심 회복을 위해 차세대 슈퍼컴퓨터 개발에 1조2천억원을 투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의 선진 각국은 슈퍼컴퓨팅 관련 기술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연구 개발을 통해 슈퍼컴퓨팅 기술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슈퍼컴퓨터 개발 경쟁은 고성능 컴퓨팅 기술의 리더쉽을 확보하기 위한 각축장이다. 특히 미국은 CPU, GPU와 같은 프로세서, 메모리, 고속 네트워크, 병렬파일시스템, 병렬 프로그래밍 모델, 컴파일러 등 고성능 컴퓨팅시스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의 모든 분야에서 기술개발을 선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슈퍼컴퓨팅 시스템 및 기술 개발을 통해 IBM, CRAY, Dell, HPE등의 글로벌 회사들은 경쟁력 있는 서버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선개발하고 상용화하는데 성공하여 전세계 서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도 레노버, 인스퍼, 수곤, 화웨이와 같은 세계 정상급 슈퍼컴퓨터시스템 기술을 보유한 회사들이 자체 기술로 개발한 슈퍼컴퓨터를 공급하여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수의 슈퍼컴퓨터 보유국이 되는데 일조하고 있다. 

국내 슈퍼컴퓨팅의 역사는 1988년 KISTI에 슈퍼컴퓨터 1호기가 도입된 이래, 현재의 5호기 누리온에 이르기까지 30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19년 현재 우리나라는 국제 슈퍼컴퓨팅 순위(Top 500 list)에 등재된 3대의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다[3]. 그러나 2002년 우리나라가 슈퍼컴퓨터 9대를 보유했을 때 불과 6대만을 보유하던 중국이 슈퍼컴퓨터 대수를 무섭게 늘려 2019년 11월 현재 228대로 세계 1위의 보유 대수를 달성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우리나라의 슈퍼컴퓨팅에 대한 투자는 정체되어 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4].

인공지능 계산을 위한 슈퍼컴퓨터 개발 노력

슈퍼컴퓨터 외에도 제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인 인공지능 기술이 국가경쟁력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6]. 따라서 각국은 인공지능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인공지능을 빠른 속도로 작동시킬 수 있는 전용 고성능컴퓨팅시스템 및 서비스에 대한 개발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구글은 TPU(텐서 프로세싱 유닛)라는 인공지능 전용칩을 개발하여 슈퍼컴퓨터급 시스템들 (TPU Pod1/2/3)를 이미 개발하였고, TPU를 일반 고객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클라우드 서비스로 제공하고 있다. CRAY사는 클라우드를 이용하여 인공지능을 위한 슈퍼컴퓨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2]. 인공지능의 중요한 기술인 딥러닝의 처리를 고속화하기 위하여 최근 수 천개의 GPU를 사용하는 연구도 널리 진행 중이며, 그 중에서도 일본의 후지쯔랩은 최초의 오픈 AI 컴퓨팅인프라인 ABCI(AI Bridging Cloud Infrastructure, 2019년 11월 현재 세계 8위의 공인 슈퍼컴퓨터)를 이용하여 Imagenet(1000 종류의 이미지 128만여장의 데이터 셋) 분류 모델의 훈련을 74.7초에 달성한 바 있다[5].

슈퍼컴퓨팅 강국을 위한 제언

이런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우리나라도 인공지능 슈퍼컴퓨팅 기술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다행히 지난 5월 4차 산업혁명위원회는 ‘인공지능 R&D 전략’의 일환으로 KISTI 누리온을 활용할 계획임을 밝히는 등 인공지능 개발에 있어 슈퍼컴퓨터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기존 슈퍼컴퓨터를 인공지능에 이용한다고 하여 딥러닝 학습과 같은 인공지능 개발이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거대 과학 문제를 풀던 슈퍼컴퓨터를 인공지능에도 이용하기 위한 기술 개발과 슈퍼컴퓨터를 인공지능 분산 처리에 활용할 수 있는 사용자의 저변확대가 필요하다. 필자는 우리 나라가 인공지능 슈퍼컴퓨팅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에 대한 기술 경쟁력 및 시장 확보를 할 수 있도록 다음 세 개의 제안을 한다.

첫째, 국가의 슈퍼컴퓨팅 및 인공지능 역량강화 방안의 마련과 지속적이고 통합적인 집행이 필요하다. 지속적이라는 의미는 단순한 예산 투자가 아니라 이어달리기식 기술개발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첨단 기술이라는 돌탑은 기초기술, 기반기술, 요소기술, 응용기술 등의 기술 컴포넌트를 차근차근 쌓아 올려야 할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당 기술 컴포넌트를 개량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슈퍼컴퓨터는 다양한 요소기술들이 잘 통합되어야 우수한 성능의 슈퍼컴퓨터가 만들어진다.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요소기술을 시스템으로 꿰어내는 통합 기술이 있어야 하며, 이러한 통합 기술 개발 노력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야 산업화에 필요한 기술 축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둘째, 슈퍼컴퓨터 시스템 및 연구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국내에 이미 구축된 슈퍼컴퓨터는 모두 국외의 글로벌 기업이 구축한 시스템이다. 국외의 글로벌 기업은 자국의 대규모 슈퍼컴퓨터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기술력을 이미 확보했기 때문에 우수한 가격 경쟁력으로 국내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다. 과거 국내 기업은 이와 같이 낮은 기술 및 가격 경쟁력으로 인해 오랜 기간 연구 개발 투자를 기피하였고, 따라서 국내기업이 슈퍼컴퓨터의 기술 경쟁력 확보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와 맞물려 대학에서도 관련 기초/기반 연구를 진행한 연구자들이 연속된 연구 프로젝트 및 관련 기업의 수요가 없어서 연구역량을 높이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학의 연구자들이 졸업 후에도 관련 연구를 진행하여 역량을 높여갈 수 있도록 연구소, 기업, 대학들이 협력적으로 슈퍼컴퓨팅시스템 연구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파편적인 요소기술의 연구에 머물지 말고, 먼저 자체 기술로 소규모 슈퍼컴퓨팅시스템을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점차로 완성도가 높은 대규모 슈퍼컴퓨팅 시스템을 개발하여 기술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의 정책적인 접근이 있어야 하겠다. 

셋째, 국내 슈퍼컴퓨팅 기술 연구에 있어 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아이콘인 인공지능 기술 개발 흐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인공지능을 위한 슈퍼컴퓨팅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에는 배정도 부동소수점 연산 보다는 인공지능에 특화된 반정도(Half Precision) 부동소수점 연산을 잘하는 프로세서로 구성된 컴퓨터와 이를 최적 운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 나라가 세계 최초로 초고속인터넷 상용화와 CDMA와 같은 무선네트워크를 구축하여 IT산업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획득한 것 같이, 독자적인 인공지능 슈퍼컴퓨팅 시스템은 인공지능 시장 및 연구에 있어 초고속통신망이 수행했던 것과 같은 인프라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내 인공지능 기술 개발이 촉진되고 인공지능 서비스 사용자의 다변화와 함께 관련 인공지능 시장과 기업이 급속히 성장하여 국내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 

결어

진입장벽이 높은 슈퍼컴퓨팅 기술은 일회성의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중국과 일본이 수 십 년 간의 연구개발에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성과를 얻은 것처럼 슈퍼 컴퓨팅 시스템은 기술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단기적인 성과에만 매달리지 않고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위의 세 가지 제안을 수용하여 국가의 연구 역량을 집중한다면, 우리 나라도 머지 않아 인공지능을 위한 슈퍼컴퓨팅 강국으로 우뚝 설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백지영,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은? 美 ‘서밋’…韓 KISTI는 13위로 밀려, 디지털타임즈
[2] https://www.sciencetimes.co.kr/?news=슈퍼컴퓨터-경쟁력이-미래의-핵심이다
[3] https://www.top500.org/lists/2019/11/
[4] 김영우 외, “세계 슈퍼컴퓨터 연구정책 현황” 전자통신동향분석 제26권 제6호 2011년 12월
[5] https://www.fujitsu.com/global/about/resources/news/press-releases/2019/0401-01.html
[6] 서정연, “사람 중심 ‘AI 국가전략’ 의미와 기대,”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19.12.26
http://www.korea.kr/news/contributePolicyView.do?newsId=148867863&pWise=main&pWiseMain=I2